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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Year 세상의 모든 계절 (2025)

​최영지 (맨션나인 갤러리 갤러리스트)

창문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고, 저녁이 되면 그 자리에 달빛이 머문다. 계절은 그렇게 바뀌고, 하루는 매번 새로운 얼굴로 다시 찾아온다. 조연주의 화면 속 ‘창’은 바깥을 향한 통로이자,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투명한 벽이다. 그 사이의 유리 한 장은 늘 모순된 감정으로 빛난다. 외부를 향한 그리움과 내면을 지키고 싶은 욕망, 기다림과 단절,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잔향이 작품 속 빛과 그림자, 겹쳐진 비단의 결 위에서 조용히 흔들린다.

조연주의 회화에는 ‘기다림’이 스며 있다. 작가는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간절한 기다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그 문장은 어린 시절 자신을 기다려 준 할머니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 깨달음 속에서 작가는 세대를 잇는 감정의 순환, 시간의 흐름 속에 겹겹이 쌓인 사랑과 그리움의 온도를 다시 그림으로 옮겨낸다.

이번 전시에서 조연주는 ‘시간’을 색으로, ‘계절’을 감정으로 표현한다. 화면 곳곳에는 시간의 결이 선명히 흐르고, 색의 스펙트럼은 한층 넓게 펼쳐진다. 한 장면 안에서도 빛이 이동하며 시간대를 바꾸고, 계절은 색의 온도로 전환된다. 봄의 미세한 연둣빛에서 여름의 짙은 청록, 가을의 붉은 노을, 그리고 겨울의 희미한 흰빛까지 — 그 변화의 리듬은 단지 자연의 순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작가의 생이 맞이하는 또 다른 ‘계절’이며,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감정의 변주이자, 한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생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녀의 화면 속 인물들은 흐릿하게, 혹은 희미하게 존재한다. 때로는 실루엣만 남거나, 색의 결 속에 스며든 듯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는 이 인물들을 통해 과거의 할머니, 그리고 그 세대가 품었던 감정의 깊이를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본다. 이제는 자신이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바라보던 시선에서, 누군가에게 비춰지는 존재로의 전환. 그 변화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순환이자, 작가의 내면이 성숙하며 마주한 ‘삶의 온도’다.

조연주의 회화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의 구조로 이어진다. 아침의 빛이 저녁의 그림자로 스며들고, 지난 계절의 색은 다음 계절의 배경으로 남는다. 화면 위에 겹겹이 쌓인 비단과 색의 층, 반복되는 붓질의 흔적은 모두 시간의 기록이자 감정의 퇴적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루와 계절, 세대와 생이 맞물려 돌아가는 느린 순환의 리듬을 본다.

작가에게 그림은 기억을 붙잡는 도구이자, 사라진 시간을 다시 살아보는 일이다. 그녀는 거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서사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가의 식물, 오후의 그림자, 손끝에 닿은 햇살, 그리고 문틈 사이로 흘러 드는 공기의 움직임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찰나를 조용히 기록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계절’을 완성한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일’을 담담히 긍정하는 전시이다. 매일의 반복과 변화, 익숙한 것 속에서 피어나는 낯섦, 그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 작가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가장 진실한 방식이라 말한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의 반복 속에서, 작가는 그 시간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누군가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 계절을 맞이하는 일, 그 작은 변화 속에서 그녀는 빛을 포착한다. 그렇게 조연주의 그림은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하루를 건네는 창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조용히 깨닫는다. 계절은 돌아오고, 마음은 이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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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l the Orchid Blooms Again 난꽃이 다시 피기까지

Oil on silk, wood frames and shelve, and white orchid

비단에 유채, 나무 액자와 선반, 그리고 흰 서양란

145 × 122 × 30 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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