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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할머니와 창 (2024) ​

KOR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애프터 라이프’에서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하나의 기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누군가 똑같은 질문을 지금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할머니와 관련된 기억을 고를 것이다. 할머니는 2023년 1월에 돌아가셨는데, 말년의 5년 정도를 서울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셨다.

 

2019년 5월, 초록이 무성한 어느 날 나는 할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요양원을 방문했다. 드시는 약 때문인지 할머니는 낮과 밤이 바뀌어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는데, 손녀가 왔다 하니 요양보호사 분께서 할머니를 깨워 주셨다. 아이처럼 잠들어 계시던 할머니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네가 왜 여기 있냐며 물었다. 하도 입어 반들반들해진 내복 같은 걸 입고, 짧게 자른 머리는 베개에 눌려 납작해져 있었다. 할머니를 보러 왔다고 하니 여기까지 어떻게 혼자 왔느냐 하며 기대치 않은 방문에 놀라면서도, 반가워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를 쓰다듬다가 하면서 한 30분가량을 머물렀다. 할머니의 손은 쪼글쪼글하면서도 믿을 수 없이 보드라웠다. 아주 미지근한 바닷물에서 오랫동안 수영을 한 사람의 피부 같았다. 내가 떠나기 전, 할머니는 집에 갈 때는 언덕을 걸어 내려가지 말고 택시를 타고 가라며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내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 아니 하나의 장면은 그 다음이다.

 

내가 떠날 채비를 하자 할머니는 정원과 요양원의 입구가 보이는 벤치 앞으로 몸을 옮겼다. 벤치 앞에는 소나무와 작은 관목들이 심어진 작은 뜰을 볼 수 있도록 큰 통유리창이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었고, 할머니는 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거기 앉아계셨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는데, 통유리창에는 정원의 나무와 카메라를 든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치고, 그 뒤로 할머니가 앉아 계신 모습이 포개어져 보였다. 그리고 그게 처음이자 내 마지막 요양원 방문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가족들과 몇 번인가 찾아가긴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창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보는 것도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2023년 1월에 할머니는 그렇게 몇 년을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된 공간에서 계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이십대 중후반에 유학을 핑계로 독립했다. 돌봄 노동에서 내가 쏙 빠지자 더 이상 할머니를 집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나는 외국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데 집중했고, 서서히 할머니라는 존재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 귀국해서는 당연히 할머니를 뵈었지만, 그건 일종의 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키운 아이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요를 깔고 몸을 부대끼며 지냈다. 일종의 조울증, 극단적인 감정 기복을 겪었던 할머니는 어느 날은 나를 꼭 껴안고 예뻐하다가도 어느 날은 어린 아이에게 잘 하지 않을 법한 욕지거리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나는 그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자, 나는 그녀가 빚어낸 내 삶의 수많은 결정들과, 할머니와 내 삶의 접점들, 두 인간의 인생이 포개어진 수많은 순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할머니와의 관계는 좋고 아름다운 것보다 괴로운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늘 나를 기다리는 존재였다. 나는 쉽게 떠날 수 있었고 결국 매번 떠났지만 할머니는 떠나지 않았다. 아마 떠날 장소도, 떠날 만큼의 기력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일년에 한 두번 한국에 와서 할머니를 만나면 항상 첫 질문은 ‘그래서 언제 돌아오냐’는 것이었다. 내가 요양원에 찾아갔을 때, 그 때도 할머니는 내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간절한 기다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 간절한 기다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긴 공부를 끝내고, 처음 다시 작가로 되돌아가서 내가 집중하는 것은 그 기다림을 그림으로 옮겨보는 것이다. 내 그림이 모두 할머니를 추억하고 기리는 것이라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코로나 시기를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면서 침대가 하나 들어가는 작은 방에서만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짧은 만남과 통화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며 반투명한 비단이 그림의 재료로 들어왔고, 비단의 지지대인 나무 틀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창문의 이미지에 상당히 오랜 시간 매료되어 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2019년의 그 창의 이미지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게 있어 창문은 외부로의 통로, 하지만 그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투명한 벽이다. 그건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창문의 이미지는 내게 언제나 누군가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창문은 집의 이미지이다-누군가 불을 켜놓고 나를 기다려주는 공간으로서의 집. 타지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지나쳐간 누군가의 창문과, 내게 허락되었던 내 방의 창, 그리고 할머니에겐 기다림의 장소였던 창문이 그래서 내게는 중요한 소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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